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제목 내가 사진을 하는 이유
작성자 관리자(anjonghwa)
(125.185.127.78)
작성날짜 2021-09-18 23:31 조회수 750


"선생님! 그 때 사진책 주고 가신 분 맞지예?"

  모처럼 삼락동 재첩국 파는 식당에
들어서 마악 앉았는데, 종업원 아주머니 한 분이
오셔서 말을 건넨다.
"예? 맞습니다만, 기억력 좋으시네요. 좀 되었는 것 같은데..."
"아이고, 선생님 말도 마이소. 우리 중학교 2학년 딸애가
학교 갔다 오면 보고 또 학원 갔다 오면 보고
밤에 그 책 보다가 잠들고
지금 몇 달째 그러고 있다니까요."

  갑자기 평소에 쌓여 있던 오만 고달픔이
봄눈 녹듯 싹 사라지는 순간이었다.
먹구름 걷히고 햇살 빛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.
'아, 어쩌면 내가 그 누군가에게
눈꼽만큼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!'

  서울에서 책을 방금 인쇄 후 제본한 책을
도서유통을 통해 교보문고 등으로 보내고
이백 권 정도는 인수 후에 내 차로 싣고서 내려오다가
저녁 무렵이라 이 식당에 들러
밥 먹으면서 에러난 데 없나
책을 다시금 확인 차 보고 있는데,
종업원 아주머니가 관심 있게 보는 듯 하여
한 권 프레젠트 해 드렸었다.

  서울에 책 만드느라고 업자 만나고
서류 작성, 계약금 지불하고 스캔, 실물 사진 선별,
책 디자인, 편집. 가인쇄 후 교정, 개별 사진을
포토샵 협의,  수정, 원고 최종 결정 작업
그리고 인쇄 중 색 농도 OK싸인 내며
밤이 새도록 검수하고 등등
다섯 번은 오르내렸다.

  뭐 당장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
알아 보는 눈 밝은 이가 많지도 않은 것 같고
작업 열심히 하느라고 하여도
괜찮은 작품은 아주 드문드문 나오기도 하고 
이제 그만둘까 하는 마음도 들고
책 내고선 시험 후에 허탈감이 밀려 오듯
몸도 이러저러 고단함이 많이 쌓이던 참이었다.

  내가 햇빛은 아니지만 혹 그늘 속에
어린 새싹 이파리들에게 비추는 거울이 되어
조금이나마 밝음을 주었다면
더할 바 없는 보람이라고 생각이 들어
여하튼 기브업을 기브업 하기로 했다.

  사진 작업 하다 보면
이쯤에서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더러더러 들고 했는데,
이상하게도 그 때마다 화가, 사진전공자
또는 일반인들로부터 격려 전화나 메일이 오곤 해서 
용기를 많이 얻었었다.

  그래도 좀더 솔직히 말하면
한 마디로 재미 있다.
새벽잠을 접고 차 몰고 몇 시간을 멀다 않고
고생 좀 많이 하곤 하지만,
꺼리 될 만한 대상을 만나 작업하고 있는
순간만큼은 완전 엑스타시 몰입이 어느덧 되어
희로애락도 잊고,
잊고 있다는 생각도 잊고,
대상과 나 하나 되어
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찍고 있지만
분명히 의식은 또렷하고
나는 확연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데
달콤한 것만도 아닌 것 같고
씁쓸하면서도 밝은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.

  사진 하다 보면
안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오는 것도 아니다
라는 생각을 더러더러 한다마는
그래도 사진 안 하면
아예 안 나온다는 것.
여하튼 열성으로 하다 보면
드문드문 하나씩은 기어코 나오고야 만다.

  정치 경제 사회 등 1층에만 사람 들끓고
2층에 사람 보이지 않으면
사는 게 점점 더 캄캄해지지 않을까.
 아무리 시간 있고 돈 있어도
학문 예술에는 관심없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지만,
돈으로 살 수 없는 즐거움으로 충만해지고
또 나누고 같이 느끼는 기쁨이!

  억생억멸 어디쯤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
우리네 살이 혼돈과 부침 속에도
나를 도웁고 누군가를 혹 도웁는다면
그나마 보람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,

  한 점 햇빛이 누군가에게
한 조각 밝음으로 전해진다면
고생 한 보따리 신새벽 백 리 길도
마다 않고 가고 싶다.
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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